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드루수스 카이사르 (문단 편집) == 사후 복권 == 서기 33년에 사망하기 이전인 서기 31년 10월 이후, 사실상 신원에 대한 복구가 진행되었다. 하지만 정식으로 명예가 회복되고 황족의 지위를 되찾은 것은, 세야누스 일당의 음모속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남동생 [[칼리굴라]]와 숙부인 [[클라우디우스 1세]]의 시대에 이르러서야였다. 칼리굴라는 서기 37년 원로원으로부터 티베리우스 유언장과 달리, 단독 황제로 승인된 직후 죽은 어머니와 두 형을 정식 신원 복구한 다음, 이들의 시신을 정식 장례를 거쳐 [[아우구스투스 영묘]]에 정중히 모셨다. 이어서 그는 숙부인 클라우디우스를 네로 카이사르와 드루수스 카이사르 형제의 동상 건립과 추모식을 담당하는 책임자에 임명했다. 아울러 칼리굴라는 죽은 드루수스 카이사르의 몰락에 크게 기여했음에도 추방되었다가 추방지에서 죽은 카시우스 세베루스의 모든 저서를 금서로 영구 지정하고, 남은 일당들의 저서들도 모두 금서로 지정했다. 이는 클라우디우스의 시대에도 이어졌다. 클라우디우스는 조카인 칼리굴라가 41년 1월에 암살된 직후, 아우구스투스 일가의 업적과 게르마니쿠스 신화를 재홍보하면서, 자신의 조카들이 겪은 비극이 불충한 이들이 벌인 현직 황제 암살로 다시 벌어졌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이 사건을 알고 있었던 이탈리아 주민, 로마군과 장병 가족들의 큰 지지를 받아 왕조 존속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한편, 드루수스 카이사르의 죽음에 직•간접적으로 연관된 리빌라의 아들이자 티베리우스의 손자였던 [[티베리우스 게멜루스]]가 중병에서의 회복 직후 살해된 이유와 클라우디우스 시대 당시 벌어진 율리아 리비아 처형, 네로 시대의 [[루벨리우스 플라우투스]] 반역사건도, 그 내면에는 이와 연관되어 있었다고 전해진다. [[분류: 로마 황족]][[분류:8년 출생]][[분류:33년 사망]][[분류:로마 출신 인물]]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